시이카 글 커미션

2023. 5. 5. 20:19

 1
 수풀이 무성하고 파도가 일렁이는 자연이 아름답다고들 했다.
 사람들은 라이터 하나비시가 인간의 슬픔과 인간의 구원을 이해하고 있는 호인일 것이라고 쉽게 짐작한다. 기원전의 사람들이 반짝이는 태양을 다스리는 누군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원대한 이야기의 끝에서 실재하는 위인이 기다리고 있을 줄로 자연스럽게 믿는다. 
 영탄하지 말라.
 언제부터인가 하나비시는 스스로 쓰는 이야기가 완고한 사람의 웅변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돌판에 쓰인 경전과 같아서 그럴듯하지 않은 말일 수록 경이롭게 들리고 사소한 어절 하나하나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굴절하고는 했다. 언제인가 하나비시는 각본의 한 자락에 적었다. 영탄하지 말라.
 자살을 꿈꾸는 남주인공은 수천만 엔의 자산을 가진 사업가다. 그가 생을 마친 계기는 뉴턴도 예측하지 못한 인간의 광기 같은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름답다고 믿지 않고자, 좋아 보이는 것들이 더 이상 그가 느끼는 허무에게 어떤 구원도 가져다주지 못하도록, 쓰지 않은 유서의 하나뿐인 경구를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2
 시즈코가 죽었다. 죽을 것 같아 보였지만 정말 죽을 줄은 몰랐다.
 하나비시가 각본을 마감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있을 때 시즈코는 앓는 소리를 냈다. 대수롭지 않게 먹은 스튜에 큼지막한 고기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 그러니까 지, 집에서 만든 요리만 먹으라고 했잖아. 아니 평생 그런 것만 먹고 살 순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몸 속에 있는 게 잘못되면 아프잖아. 내가 허락한 적도 없는데 내 몸에 들어있는 게 나쁜 거야. 심장이든 목숨이든 마음이든 다 그래. 서로 가까이 있으면 공전 궤도의 반지름만큼밖에 안전하지 못한 거고, 언젠가는 그렇게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었다고 깨닫게 될 테지.
 시즈코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런데 평생 아무것도 안 먹고, 아무하고도 말 안 할 수 없잖아.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내가 너무 불쌍해......
 하나비시는 텍스트 파일을 클라우드에 백업한 뒤에 시즈코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시즈코는 어느 동화의 결말을 들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3
 아 하라주쿠! 스파이시 앤 스파클링 청춘의 곧은 획!
 하나비시는 심부름을 하러 그곳으로 갔다. 행인들의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눈길마저 태양을 맨눈으로 본 듯이 시어 고통스러웠다. 시즈코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는데 그 또한 가축의 아늑한 우리 같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좋았을 것을 불안 증상이 악화되어 다른 도리가 없이 하나비시의 옆구리를 꿰차고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니시오가 다녀오라고 한 게 이, 이 가게였나. 하나비시는 계면쩍은 눈길로 가게의 면면을 훑었다. 그 순간 그는 이곳에서 자신과 시즈코만이 특이한 이름을 가진 소년처럼 세상에 호명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가게의 간판에서 네온사인이 휘영청 번쩍였다. 아 하라주쿠! 스파이시 앤 스파클링 청춘의 곧은 획! 
 돌아가자.
 시즈코가 돌연히 말하며 하나비시의 옷소매를 쥐었다. 하나비시의 마음속에서 숫제 무료한 목소리가 싫어, 하고 중얼거리다가도 이내 그것은 심장의 한켠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가슴은 이제껏 그런 식으로 아가미처럼 고인 물 안에서도 숨을 쉬어 왔다.
 아 하라주쿠!
 스파이시 앤 스파클링 청춘의 곧은 획!
 
4
 하나비시는 영감을 얻기 위해 중세나 근대의 음악을 곧잘 듣는다. 그는 고리타분한 MP3 플레이어를 사용한다. 시대에 발 맞추어 걷지 못하는 사물들로부터 하나비시는 다습한 안도감을 느낀다.
 머리가 너무 아파.
 어, 어제 약 사온 거 서랍에 두었어. 꺼내 먹어.
 하나비시는 관료적으로 대꾸한 뒤 집필을 계속했다. 시즈코가 몸을 뒤척이며 바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음 날 MP3 플레이어의 선이 끊겨 있었다. 시즈코는 하나비시에게 음악 파일을 보낼 테니 무엇이든 새 기기를 장만해서 들으라고 했다. 하나비시는 굳은 피로 가득 찬 혈관을 대하듯이 무성의하게 플레이어를 들어 수거함에 넣었다. 
 그는 시즈코의 메일 주소로 온 MP3 파일을 확인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더불어 제목으로 날짜가 쓰인 파일 하나가 있었다.
 하나비시는 파일을 재생한다.
 그 몸짓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바스락, 바스락.
 쾅, 쾅.
 우지끈. 바스락, 바스락.
 


 

세계. 애졌고요 찢었고요 하는 좀스러운 자식들이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그 고지식한 낱말들의 안쪽을 들여다보자. 하늘을 지키는 천사였을  때, 시즈코는 썩지 않는 황금 사과를 먹으며 세계의 멸망을 보았고 질량이 없는 나라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사랑도 보았다. 천국에서는 무리수에게도 규칙이 있었고 모든 이름은 생명책에 있거나 없었다. 저 밑에 사는 시민 김씨가 민초에 김치를 비벼 먹는 특출난 사람이라고 해봤자 주민등록번호로 식별되는 개체일 뿐인 것처럼. 그러므로 세계에서 알 수 없는 것은 없었고, 노아의 방주에서 코끼리는 풀때기를 먹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사실, 병증으로 죽은 최 군의 천이백원짜리 컵라면을 즐겨 먹는 습관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시즈코는 어느 날 오차방정식의 근을 구하다가 깨달았다. 하느님 나는, 붉어진 뺨이 탐스러운 그 청년이 빚어 이 달러에 파는 그 빵 하나면 되었다. 영원한 생명은 말하지. 염려하지 말라고. 그러나 하느님 나는, 당신이 보우하시는 것들을 응시할 때마다 삶 없이 살 수 없게 된 이들의 불안을 보았다. 그 길로 시즈코는 도망을 갔다. 지상에서 하나비시라는 가소로운 녀석을 만나 실컷 갈구고, 그놈의 집에 살기로 했다. 시즈코는 그저 그런 공책인 것처럼 꽂아둔 일기장에 쓴다: 그는 기회주의자다. 살고 싶은 티도 내지 않으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삶이 주는 불면은 취하고 단잠은 거리끼면서 쉼을 얻은 자들이 다다르는 소멸을 피하는 음습한 놈이다. 그는 오늘 아침으로 양배추와 식빵을 먹었다. 그건 샌드위치가 아니었다. 무엇 하러 토핑 따로 빵 따로 먹느냐고 하니 그게 제 식성이란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심코 빵 한 덩어리를 집어서 먹어 보니 딱딱하고 미적지근한 것이 아주 끔찍했다. 천사들은 지옥이 죄를 지으면 가는 괴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고 싶지도 않은데 별 말 같지도 않은 빵 쪼가리나 먹으며 살게 하는, 이 삶이라는 것은, 분명 구원과는 아주 멀다. 삶은 욕망의 응어리다. 갈증과 식욕. 무언가를 시원에서 빼앗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예쁘고 지긋지긋한 고통.

 


 

고요 속에서, 보컬이 첫 소절을 부르면 반주가 그 뒤를 따르는 것처럼, 시즈코의 불합리한 지적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되었다. 그는 하나비시가 쓰는 표현이 타성에 젖어 있다며 연신 비난했고, 그것은 그가 우울감을 토로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한편, 하나비시는 그게 오히려 총 소리에 뒤따르는 군중의 비명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시즈코는 그 날도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때 하나비시는 노트북으로 원고를 쓰다가 말다가 하던 중이었고, 타건 소리에 쿵, 쿵 하는 울림이 분진처럼 끼어들었다. 또 한 번 죽기에 실패한, 시즈코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무기력했다.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헛것 같은 소음이 연거푸 울려퍼졌다. 스크린 안에서는 남주인공인 B가 종합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사거리로 나가기 위해 B는 가로수와 가로등 사이를 가로질렀다. 조연 S는 예체능 입시를 포기하고 재수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재수학원에 등록하러 가는 S가 B와 같은 골목길로 들어서려고, 하는 순간, ‘B는 왜 직장을 그만두는 대신 위장병을 안고 사는 거야?’ 하고 시즈코가 난데없이 물었다. 

‘S는 재수학원 건물로 간다. 언어가 너무 단조롭지 않아?’
‘……’
‘어째서 B와 S의 충돌을 그렇게밖에 그려내지 못하는 거야?’
‘……’
‘너는 사기꾼이야.’ 
‘……’ 

창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적요한 레드 썬이 최면술의 장치인 것처럼 하나비시는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아무 말도 없이. 시즈코의 육성, 시즈코의 공허한 목소리가 홀로 눌린 건반이 내는 소리처럼 따분하게 퍼지고, 그것이 아름답게도 추악하게도 들렸을 때부터, 하나비시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기를 실패했다. 영리하고, 우울하고, 무능한 시즈코. 시즈코는 자기만 불쌍했고, 시즈코는, 남이 작업을 하는데도 쿵, 쿵 소리를 내며 방해했지만, 그의 지리멸렬한 지적을 듣고 있으면 하나비시는 자신의 말들이 더 특별했으면 하는 소망을 떨치지 못했다. 마침내 찾아온 시즈코의 침묵 가운데 하나비시는 엔터 키를 타건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미적인 극한을 느꼈다. 결국 더 아름다운 말을 찾지 못했다. 열한 번의 퇴고에 모두 실패한 하나비시가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나로 하여금 네가…… 사, 살기를, 살기를 바라게 하는 것 같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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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에서, 보컬이 첫 소절을 부르면 반주가 그 뒤를 따르는 것처럼, 시즈코의 불합리한 지적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되었다. (…) 하나비 시는 그게 오히려 총 소리에 뒤따르는 군중의 비명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고 느꼈다.

 

쉼표를 사용한 호흡은 글 전반을 아우릅니다. 그로써 본문의 지반은 ‘기능으로서 존재하는 소설의 평이한 문장’ 가운데 ‘시적인 리듬’을 함의하게 됩니다. 이는 시즈코가 시종일관 하나비시의 소설적 표현을 시적 표현으로 윤색하라 지적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한편 도입부의 문장 자체는 ‘어느 순간부터 난데없이’ 나타난 시즈코의 병리적 증상을 가리킵니다. 문자 그대로, 돌연 고요 속에서 내질러진 첫 소절처럼요. 그것은 보컬의 뒤를 따르는 반주처럼 음악적인(시) 개연성을 지녔기도 하고, 총 소리와 비명 소리처럼 서사적인 인과(소설)만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즈코는 그 날도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때 하나비시는 노트북으로 원고를 쓰다가 말다가 하던 중이었고, 타건 소리에 쿵, 쿵 하는 울림이 분진처럼 끼어들었다. (…)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헛것 같은 소음이 연거푸 울려퍼졌다.

 

그렇기에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는 어떤 인과관계도 명시적으로 함의하지 않는, 중립적인 표현입니다. ‘타건 소리에 쿵, 쿵 하는 울림이 분진처럼’ 끼어드는 것처럼, 이들 사이에 명확한 질서나 인과, 연결고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재수학원에 등록하러 가는 S가 B와 같은 골목길로 들어서려고, 하는 순간, ‘B는 왜 직장을 그만두는 대신 위장병을 안고 사는 거야?’ 하고 시즈코가 난데없이 물었다. (…) 창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적요한 레드 썬이 최면술의 장치인 것처럼 하나비시는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아무 말도 없이.

 

시종일관 평이한 문장으로 쓰이던 하나비시의 시나리오는 시즈코의 돌연한 물음으로 인해 쉼표의 호흡, 즉 시적인 리듬을 띠게 됩니다. 하나비시의 침묵은 일련의 음악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간 작업물에서 전달 드렸던 것처럼) 서사와 장면을 보조하는, 무언과 감해짐의 언어인 것입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미적인 극한을 느꼈다. 결국 더 아름다운 말을 찾지 못했다. 열한 번의 퇴고에 모두 실패한 하나비시가 입을 열 었다.

 

시즈코가 죽기에 실패했다면, 하나비시는 ‘결국 더 아름다운 말을 찾지 못해서’ 글쓰기에 실패했습니다. (해당 문장은 ‘미적인 극한’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는 함의로도 읽히도록 중의성을 의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야말로 글쓰기의 미적인 극한, 살아가는 행위가 곧 실패의 기술임을 직면한 하나비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 너는, 나로 하여금 네가…… 사, 살기를, 살기를 바라게 하는 것 같아…… .”


쇠유즈님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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